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성근/야구 스타일 (문단 편집) ===== 삼성 라이온즈 시절 ===== * 비판론 : 당시 삼성은 [[이만수]], [[장효조]]를 비롯하여 리그 최강의 핵타선을 보유한 타격의 팀이었다. 김성근은 이런 삼성의 호화타선을 거느리고 스몰볼 성향의 번트야구를 했다. 삼성 시절 김성근의 번트야구는 호쾌한 야구를 선호했던 삼성팬들의 반발을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삼성의 성적도 시원찮게 나오면서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기 직전인 1990년 삼성은 131개의 홈런으로 압도적인 리그 1위를 달성했지만,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번트 위주의 야구와 주포였던 [[이만수]] 길들이기 등으로 팀 홈런 개수가 감소하였다. 그 결과 김성근 감독 재임기인 1991년과 1992년 삼성은 2년 연속으로 팀홈런 3위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자 이듬해인 1993년 삼성은 다시 133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팀홈런 1위를 되찾았다. * 옹호론 : 1991-1992년 삼성의 희생번트 개수는 1991년 리그 3위, 1992년에는 리그 6위로 타팀 대비 결코 많은 편이 아니었으며, 홈런이 감소하였다고는 하나 리그 3위 수준은 유지하였다. 이 시기 삼성 타선의 부진은 우선 장효조가 선수협 파동으로 최동원과 트레이드되면서 1989년 기점으로 사라졌고, 공격의 핵심이었던 류중일, 김성래 모두 부상으로 부진하였던 것이 컸다. 1990년 대활약했던 박승호 또한 해당 시즌 말고는 부진하였기에 김성근 감독의 옵션으로는 부족하였다. 즉 당시 김성근 집권기의 삼성은 1980년대의 삼성에서 오직 이만수 정도만 남아 있었고, 새로이 등장한 강기웅, 동봉철 정도가 주목할 정도 수준이었다. 다만 선수협 파동 이후 팀 내 불화가 끊이질 않았고, 특히 이만수, 류중일 등과의 마찰이 심해 선수단을 장악하지 못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실책이었다. 즉 스몰볼 문제보다는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많이 터져나온 시기였다. 1993년 급격한 삼성의 상승은 김성근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던 이종두, 김성래의 복귀와 양준혁의 등장, 부상에서 회복한 류중일의 복귀 등이 모두 맞물린 결과이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